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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장부 넘기는 소리

파티는 여전히 한창이었다. 한 명씩 이어지던 인사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흩어져,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아까처럼 사방에서 터지던 환호는 잦아들었지만, 등불은 여전히 따뜻하게 타올랐고 그 빛이 천장 위 밤하늘과 겹쳐 은은하게 일렁였다. 사가가 가져온 나팔 소리도 이제는 잔잔한 가락으로 바뀌어 있었고, 야시장 간식이 쌓여 있던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 몇 개만 남아 조용히 식어가고 있었다. 데워졌던 밤공기도 어느새 식어, 등불 곁을 벗어나면 서늘한 기운이 옷자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곳곳에 남은 색색의 리본과 타다 만 등불 심지에서 옅은 냄새가 피어올랐고, 그 냄새마저도 오늘 하루의 소란을 붙잡아두려는 듯 공기 중에 오래 머물렀다. 평소라면 광장 반대편, 하우스 쪽에서나 마주칠 수호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 마론과 오르가 한쪽에서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상임위에서 진행한 최근 연구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카이는 지나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수호자들의 따뜻한 환대에 목례로 화답했다.

"카이님!!" 이리스가 호들갑스럽게 다가와 카이의 두 손을 덥석 맞잡았다. "만 명째라니, 이거 완전 역사적인 순간이잖아요! 저 이거 카드로 만들어서 서고에 걸어두고 싶어요, 진짬— 아니, 진짜 진심으로요!"

"또 시작이다." 카엘이 옆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저었다. "너 서고 벽에 카드 만들어 붙이는 거 완전 취미다, 취미. 지난달에도 아쿠 발명품 성공했다고 하나 붙였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지! 만 명은 숫자 자체가 다르다고!" 이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항변했다.

"카드 만드는 거 말릴 생각은 없는데, 서고 장부 정리부터 마치고 해. 이번 달 것도 아직 안 끝났잖아." 카엘이 말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리스가 발끈했다가, 곧 한풀 꺾여 시선을 피했다. "……내일까지 할게."

"내일까지다." 카엘이 못 미덥다는 듯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이리스는 대꾸 대신 딴청을 피우며,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방금 나눈 대화까지도 재빨리 한 줄 적어 넣었다. 카엘은 익숙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고도 더는 말리지 않고 그저 웃었다. 그러고는 제 친구를 볼 때와는 다른 해사한 미소로 카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만 번째라니, 대단하네요."

카이는 웃으며 인사를 받다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리스도, 카엘도 와 있는데, 루엔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화신도 수호자도 손님에게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건 다 저 셋 — 이리스, 카엘, 루엔이 뒤에서 골치 아픈 서류를 대신 짊어져 준 덕분이었다.

카이는 구석 테이블로 슬쩍 다가가, 쿠키 몇 조각을 헝겊에 주섬주섬 챙겨 담았다. 그러고는 광장 가장자리를 벗어나, 성운 금고 쪽으로 곧장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는 이리스의 서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둥근 아치 지붕 아래로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들과 그 안을 빼곡히 채운 책들이 어둠 속에서도 묵직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은 활짝 열린 채였는데, 그 틈으로 보이는 안쪽은 누군가 급하게 자리를 뜬 듯 어수선했다 — 펼쳐진 채 그대로 놓인 수첩과, 반쯤 밀려 나온 의자가 이리스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보이는 달빛 야시장도 언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등불만은 환하게 밝혀둔 채, 정작 지키는 이 없이 조용했다. 몇 걸음 더 걷자, 파티의 소란은 마치 다른 세계의 소리처럼 아득해졌고, 그 자리를 대신해 걸음 소리만 또렷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발밑 돌바닥의 감촉마저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역시나, 루엔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손에 든 장부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성운 금고 안쪽은 천장까지 닿는 선반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선반마다 두꺼운 장부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중 한 권이 유독 스스로 빛을 내며 책장을 저절로 넘기고 있었다 — 페이지마다 옅은 빛이 스치듯 지나가며 그날의 기록이 저절로 새겨졌다. 루엔은 그와는 별개로 자기 몫의 장부를 손수 정리하는 중이었다. 책상 위에는 램프 딱 하나만 놓여 있어, 그 작은 불빛이 루엔의 손끝과 장부 위에만 동그랗게 고여 있었다. 자동으로 채워지는 장부의 빛과, 사람 손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는 장부의 그림자가 한 공간 안에서 나란히 움직이고 있었다.

"루엔." 카이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며 불렀다.

루엔이 고개를 들었다. "카이님." 정중하지만 담백한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지금, 광장에서……." 카이가 헝겊 꾸러미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조금 쑥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이거."

루엔이 들고 있던 장부를 책상에 내려놓고 일어나, 카운터로 건너와 꾸러미를 받았다. 잠시 꾸러미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이런 것까지 안 챙기셔도 됐는데."

"근처 지나가다 생각난 거야, 별거 아니야." 카이는 카운터에 슬쩍 팔을 걸치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카운터 너머에는 의자 딱 하나와 큰 책상, 그리고 빼곡한 선반뿐이었다. 광장 저편의 화려한 등불과는 참 다른 풍경이었다. "일이 많아?"

"장부가 안 끝나서요." 루엔이 대답했다. "게다가 그런 자리엔, 제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고요."

"낄 자리가 왜 없어." 카이가 살짝 눈썹을 올렸다. "다음엔 억지로라도 끌고 갈까 보다."

루엔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 오래 붙잡고 있던 긴장이 살짝 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생각해볼게요."

카이는 그 미묘한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손님을 상대할 때 늘 하던 일 — 상대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일 — 이 여기서도 습관처럼 작동했다. 루엔은 지금, 웃고 있지만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았다. 멀리서는 아직도 흥겨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넘어오고 있었다.

루엔은 풀어둔 꾸러미를 다시 여며 들고 책상으로 돌아가, 장부 옆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도로 자리에 앉아 장부를 펼쳤다.

"저 소리, 여기까지 들려?" 카이가 물었다.

"조금요." 루엔이 장부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가끔은, 여기 앉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충분하다는 거랑 괜찮다는 건 다른 말 같은데."

루엔은 대답 대신 살짝 시선을 내렸다. 부정하지 않는 침묵이었다.

카이는 그 침묵을 굳이 채우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카운터 너머, 자동으로 넘어가는 장부의 빛이 한 번 스쳐 지나갔다. "그럼 다음엔 문 앞까지만이라도 나와볼래? 안까지 안 들어와도 되니까."

"문 앞……." 루엔이 그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 "생각해본 적 없어요."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거, 안 된다는 거랑 다른 말이잖아." 카이가 아까 자신이 했던 말과 같은 식으로 되받으며 웃었다.

루엔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카이를 바라보다가, 아까도 똑같은 화법으로 자신의 말을 짚어냈던 걸 뒤늦게 떠올리고는,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또 그러시네요. ……졌어요."

"루엔." 카이가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너무 오래 여기만 있지 마. 가끔은 나와서 좀 쉬어도 돼."

루엔은 잠시 카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장부로 시선을 내렸다. "……저는 여기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이 어딘가 쓸쓸하게 들렸지만, 카이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맞는 것 같다는 말과, 맞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지금 그 차이를 굳이 짚어내는 건 루엔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카운터에 걸쳤던 팔을 떼며 가볍게 웃었다. "여기서도 파티 분위기가 어렴풋이 느껴지긴 하네."

"……만 번째, 들었어요." 루엔이 나직이 말했다.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지만,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축하드려요, 카이님."

카이는 잠시 멈칫했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마워, 루엔."

돌아서는 카이의 등 뒤로, 루엔은 다시 장부를 넘기기 시작했다. 다만 그 손끝이 아까보다 조금 느려져 있었다.

카이는 왔던 길을 되짚어 걸으며, 다시 서고의 어두운 윤곽을 지나쳤다. 멀리서 등불 빛이 다시 밝아오는 게 보였다. 파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었지만, 카이의 머릿속에는 방금 두고 온 큰 책상과 그 위의 작은 불빛이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문 앞까지만이라도." 카이는 나직이 그 말을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다음번엔 정말로 그 말을 지키게 될지, 카이 자신도 아직은 알 수 없었다.